우리는 ‘변명’을 위해 부르심을 입지 않았다!
교회는 여건이 아니라 생명과 능력으로 부흥한다. 아무리 강력한 ‘문제’와 ‘도전’이 있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강력하게 ‘응전’한다면 승리는 항상 우리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왜 부흥하지 못하는가를 설명하는 ‘변명’을 위해서 부르심을 입지 않았다. 당면한 문제, 당면한 죽음의 상황을 깨뜨리라는 사명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무리 ‘죽음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상황’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아직도 부흥치 못하는 연약함을 여건 탓으로 돌리겠는가? 우리에게 남은 것은 변명도 아니요 핑계도 아니요, 오직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위해 “죽도록 충성”(계 2:10)하는 일뿐이다.
마른 뼈의 상황은 변화될 수 있다.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닥친 문제가 큰가? 하나님이 더 큰 능력을 주실 것이다. 닥친 문제가 어려운가? 하나님이 더 큰 지혜를 허락하실 것이다.
《마른 뼈도 살아날 수 있다》(이하 《마른 뼈》)는 내가 처음 쓴 책이다. 미숙했지만 뜨거움만은 뒤지지 않았던 20대 때의 기록이다. 오래되고 커지면 변질된다고 한다. 요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변질되지는 않았는가? 에베소교회를 향한 경고가 다시 들린다.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3,4). 길을 잃었을 때는 처음 장소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내가 먼저 읽어야 할 책이 바로 《마른 뼈》이다. 1994년 내가 담임목사로 부임한 후, 감사하게도 삼일교회는 놀랍게 부흥했고 특히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우리 교회가 어디에서 시작한 교회인지, 어떤 바탕에서 출발했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입소문으로 퍼져나간 것이 삼일교회의 정신(spirit)을 알기 위해서는 《마른 뼈》를 읽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많은 청년 리더들이 이 책을 읽었다. 16년이란 세월이 지나 이전의 청년들은 이미 장년이 되었다. 새로운 청년들에게 뿌리를 알게 할 필요성이 있다. 이것이 바로 《마른 뼈》 개정판의 취지이다. 이제 2만 명이 넘게 모이는 삼일교회는 처음부터 큰 교회는 아니었다. 부임 당시 40년 된, 교인 수가 100명도 되지 않던 교회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 영적(靈的) 싸움을 거치면서 성장해왔다. 그 뿌리를 살피는 것은 다른 많은 동역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미 커진 줄기와 열매보다는 원래의 뿌리를 살피는 것이 부흥의 원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본문의 서론 격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강조하고 싶다. 풋내기 정신 삼일교회 초창기에는 ‘풋내기 정신’을 많이 강조했다. 기성 교회, 오래된 교회는 왜 부흥이 잘 안 되는가? 왜 오래 믿고 더 잘 믿는 것 같은 사람들에게서는 능력이 잘 드러나지 않는가? 언젠가는 우리도 오래 믿고 잘 믿었노라고 말할 날이 올 것인데, 가만히 앉아서 그날을 기다릴 것인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빠진 함정이 있다. 뭘 완벽하게 알아야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경험이 많아야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삼일교회의 제주 선교 기간 중에 2천 명에 가까운 청년들과 함께 한라산 윗세오름에 올랐다. 힘들었지만 낙오자 없이 완등했다. 이후 미륵산, 용문산, 눈 덮인 곤지암을 올랐다. 어떻게 험한 조건을 이겨냈는가? 몰랐기 때문이다. 알면 못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몰랐기 때문에 시도하고, 성공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풋내기의 능력이다. 미숙함에서 풋내기의 잠재력을 느낄 수 있다. 젊은 교회나 젊은 선교 단체가 성장할 때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풋내기 정신으로 무장했다는 점이다. 1970~80년대에 선교 단체들의 엄청난 성장이 있었다. 부흥 당시, 선교 단체의 양육 방식은 훈련받은 선배나 또래가 다른 동료를 양육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반 교회에서와 같이 신학 훈련을 받은 교역자들이 아니었다. 선교 단체의 간사들은 풋내기 평신도였다. 훌륭한 목사나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풋내기들의 줄 이은 양육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룬 것이다. 풋내기들이 오히려 더 강력하다. 많은 목회자들이 양육을 장기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장의 속도를 너무 느리게 생각한다. 그것은 성도들을 얕잡아 보는 것이다. 평신도들을 오래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지도자들은 더 느릿하게 길러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나(바울)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 심는 일, 물 주는 일, 자라는 일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어수선하고 정신없을 때, 사실은 일이 이루어진다. 장사 잘되는 곳을 보라. 정돈이 잘돼 있는 곳은 장사 안 되는 곳이다. 어수선할 때 성장한다. 죽은 질서보다 살아 있는 혼돈이 더 낫다. 풋내기를 투입하라. 풋내기를 사용하라. 그러면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1,2). 바울은 풋내기 디모데에게 개척한 교회를 맡겼다. 그리고 떠났다. 이 구절에서 디모데에게 권하는 것은 무엇인가? “너도 또 풋내기들에게 맡기라”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또 다른 풋내기들을 가르칠 것이다”라는 메시지이다. 이것이 풋내기 이론이다. 알고 보면 칭기즈칸도 풋내기 이론으로 제국을 건설했다. 풋내기 전법은 세계를 50년도 안 걸려서 손아귀에 넣은 방법이었다. 그는 일단 한 곳을 정복하면, 정복당한 사람들을 다른 곳을 정복하라고 내보냈다. 오랜 양육과 훈련을 한 것이 아니다. 그냥 풋내기를 내보내고, 또 내보냈다. 풋내기들은 싸우다가 배웠다. 싸우다가 전사(戰士)가 되었다. 이것이 풋내기 전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안일한 삶에서 벗어나 ‘풋내기 군사’가 되어야 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마귀도 풋내기 전법을 쓴다. 인터넷을 보라. 대개 어린 학생들, 컴퓨터를 배운 지 1년 안 된 초보자들이 허위 정보를 퍼뜨린다. 인터넷을 아는 사람은 아이피 추적하면 걸려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까봐 함부로 못한다. 그런데 풋내기들은 이런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악한 일이 급속하게 퍼지는 것이다. 풋내기를 선한 뜻으로 활용하는 곳에는 항상 엄청난 승리가 있다. 교회에서도 제일 뜨겁고, 헌신적이며, 복음의 능력이 살아 있는 사람은 대부분 풋내기 신자이다. 믿은 지 1년 이내의 신자들이 제일 강력하다. 전도도 잘하고, 뜨거움도 있고, 순수함도 잃지 않는다. 기성화되는 것은 굳어지는 것이다. 복음의 원시성을 회복하라. 교회가 강력해지는 법은 자명하다. 첫째, 풋내기들을 열심히 만들어내는 구조로 만들라. 전도가 막히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새로운 유입이 없으면, 반드시 굳어지게 되어 있다. 둘째, 풋내기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풋내기들이 오히려 더 잘한다. 더 창의적이다. 더 진취적이다. ‘묵은닭’이 못하는 일이 있다. ‘햇닭’의 풋내기성을 귀한 것으로 여기자. 셋째, 나의 풋내기 의식을 되살리자. 첫사랑의 회복이 필요하다. 언제나 새로운 도전을 하라. 아무것도 안 하면서 어른인 척하지 말라. 오히려 내가 성장의 장애일 수 있다.
야전군 정신 교회는 야전군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왜 교인의 수가 줄어드는가? 전도의 경험이 없고, 전도에 약한 영적 지도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지도자들이 믿는 사람 양육하는 것만 전공이다. 이미 믿는 사람을 데려오면 양육하겠다는 자세이다. 초신자 양육에 너무 약하다. 전도에 너무 약하다. 이런 부교역자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전도 전문가, 전도 훈련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 모집.”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담임목사가 순진하게 느껴진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백보 양보해서 이런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능력 있는 사람이 뭐 하러 남의 밑에서 일하겠는가? 독자적으로 하지! ‘내’가 전도해야 한다. ‘내’가 해보아야 한다. 물은 그 근원보다 높아질 수 없다. 해본 사람, 할 수 있는 사람 밑에 사람들이 모이고 변화되는 것이다. 대기업 이사들의 변화를 보라. 재경 계통의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서 세일즈맨 출신으로 변화되고 있다. 즉, 야전군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전도는 세미나가 아닌, 실습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왜 평신도 지도자들이 강한가? 해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복음 누구나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 ‘십자가 복음’이 중요하다. ‘원색적인 복음’이 중요하다. 메시지 같지도 않은 메시지가 있다. “북 카페 만들어주고 운동 시설 지어주고 여가 시설 운영하면 부흥을 이룰 수 있다” 같은 말이다. 회심(回心)은 오직 십자가 복음만으로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십자가 복음으로 종횡무진 움직였던 기록이다.
목숨을 건 예배 예배에 목숨을 걸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을 보라.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예배자를 키워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이다. 예배는 목사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도하는 것이다. 예배는 언제까지 드려야 하는가?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이다. 예배가 뿌리이고, 나머지는 모두 파생물이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는 것이 예배이다.” 그런 예배를 드려보았는가?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변화된다. 성도들은 예배를 통해서 무장한다. 《마른 뼈》는 예배 운동의 기록이다. 이 예배 운동이 강퍅한 사람들을 변화시켰고, 지금도 변화의 큰 흐름은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다.
은혜에 붙들려 모든 것이 은혜이다. 16년 동안 주신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삼일교회 찬양팀에서 만든 찬양이 있다. “은혜로다 주의 은혜 날 살리신 주님의 큰 은혜라. 은혜로다 주의 은혜 날 살리신 주님의 은혜. 그 은혜 내 맘에 영원히 나를 붙들고 가네. 그 은혜 평생에 영원히 나를 일으키시네.” 이것이 나의 고백이요 삼일교회의 고백이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전병욱
[초판 서문]
불덩이 복음 전파의 증언록
사도 바울은 사역 전반기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역 초기에 이런 말 한 번쯤 하지 않은 목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감에 따라 변질되어간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쳐간다(갈 3:3). ‘불덩이’로 시작하였다가 ‘숯덩이’로 끝을 맺곤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기록한 서신서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義)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그의 사역 전반기의 기도와 인생 마지막 순간의 기도 사이에 전혀 변함이 없다. 그의 삶은 복음으로 시작해서 복음으로 마친 삶이었다. 나의 사역도 사도 바울과 같이 처음과 나중이 전혀 다르지 않는, 변함없이 충성으로 일관된 사역이 되기를 기도한다. 이 책의 내용은 나의 사역 초기의 고백이다. 이 책에는 나의 젊음을 불태워가면서 복음을 증거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불덩이와 같이 돌아다니며 성령의 불을 붙였던 뜨거움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이 사역의 침체 상태에 빠진 사역자에게 불을 붙여주고 사역의 방향을 못 잡고 방황하는 지도자에게 나침반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의 사역은 오직 하나님 은혜의 산물이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이 책을 빌어 감사드릴 분들이 여럿 있다. 좋은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신 부모님, 묵묵히 기도하며 내조해준 사랑하는 아내와 딸 혜연,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시는 기도의 동역자 김복순 집사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부족한 종인 내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삼일교회 성도님들과 장로님들, 필요한 자료를 찾아주고 정리, 교정하는 작업까지 하느라 수고한 사랑하는 제자 나현희, 안정숙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들어가는 말]
마른 뼈도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다!
대학·청년부 사역에 관한 집필을 의뢰받고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우선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셨던 엄청난 비전과 영광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은 다 지나간 사역을 회상하며 서술한다는 것이 ‘과거를 팔아먹고 사는 늙은이’나 하는 일 같아서 유쾌하지 않기도 했다. 나는 “왕년에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 왜냐하면 내가 정복해야 할 땅은 항상 ‘미래’에 있고,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로, 하나님이 역사하신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신념 때문이다. 나도 보통 한국 사람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집안이 일제(日帝)의 핍박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본인의 장점에 대하여 구구하게 나열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이런 싫어하는 감정을 참아가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메모 습관’이다.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기내(機內)의 마지막 상황과 자신의 심정을 메모하는 민족이 일본인이다. 이것은 우리를 전율케 하는 사실이다. 일본 저력의 비밀은 이 ‘기록’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목회 사역을 하는 데 17세기 이후 청교도들의 기록에 힘입은 바 크다. 청교도들의 기록은 실로 ‘영감의 보고(寶庫)’이다. 그들의 기록을 읽는 중에 그들에게 임했던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할 수 있었고, 그들이 준 영감(靈感)으로 사역하는 중에 청교도들이 맛보았던 불같은 영적 승리를 나도 경험할 수 있었다. 성령께서는 성도의 기록을 통해서 시대마다 새롭게 불붙여주신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을 통해서 디모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듯 하게 하는 것을 소망했듯이(딤후 1:6), 나도 이 글을 통해서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모든 동역자에게 임하기를 소망한다. 둘째로, 한국 교회에 대학·청년부 사역의 부흥이 오기를 고대하는 마음 때문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위기를 맞고 있다. 부흥은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회자(膾炙)되고 있다. 각 교회들이 약화되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 교인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주일학교마다 학생들이 모이지 않아서 비상이 걸렸다. 특히 교회에 청년들이 모이지 않는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앗수르에 포위당한 히스기야의 절규가 우리 입에서 절로 흘러나온다.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사 37:3). 아이를 낳아야 하는 당위는 알겠는데,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으로 영혼을 살리는 부흥이 있어야 함은 알겠는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해산할 힘이 없다. 히스기야가 느끼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이 바로 현재 우리가 느끼는 절망감이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 절망이란 없다.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능히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까지 ‘마른 뼈의 상황’을 많이 접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과 기름부으심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는 항상 그 상황이 ‘하나님의 군대가 행진하는 상황’으로 변화되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부흥의 불길을 나누기 원한다. 그래서 도처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군대로 행진하는 모습을 보기 원한다.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이러한 승리는 어디에서나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셋째로, 영적 지도자들에게 ‘자극을 주기’(stimulating) 위함이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의 흥망성쇠는 지도자에게 달려 있다. 지도자가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양 떼는 모두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지도자가 성령의 사람이면, 그의 양 떼도 모두 말씀과 함께 죽고 사는 존재로 변화받게 된다. 지도자가 중요하다. 모든 운명은 지도자에게 달려 있다. 타락의 책임도 지도자에게 있고, 분열의 책임도 지도자에게 있다. 동시에 승리의 원동력도 지도자에게 달려 있고, 부흥의 불길도 지도자에게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의 목적은 가르침(teaching)에 있지 않고 자극(stimulating)에 있다. 오랜 기간 대학생들을 접하면서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그들은 가르침받기보다는 자극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대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중요한 책이 있다고 하자. 대학생들에게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면, 그 말에 호응하여 따르는 사람은 20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접근 방법을 달리해, 그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그 책을 통해서 내가 얻은 유익과 맛본 승리를 진심을 담아 말했다고 하자. 다만 나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경우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 강의를 들은 거의 모든 학생들의 손에 그 책이 들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가르침보다 강한 것이 자극이다. 나는 이 글에서 나의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 것이다. 많은 부분이 잘난 척하는 것으로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선한 의미에서 많이 약 오르고, 많이 열 받고, 많이 뜨거워지고, 많이 눈물 흘리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대적 마귀를 물리치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되기 바란다.
부흥의 소문이 들리는 날을 바라며 글이라는 것은 항상 왜곡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특정한 사건이 지나치게 미화되기도 하고, 사실과는 다른 내용이 더해지기도 한다. 이 책은 부흥에 관한 이론서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과 동행하며, 젊은 대학생들과 함께 믿음의 싸움을 벌였던 2년 6개월의 사건들을 서술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정리된 이론보다는 내가 시무했던 대학부의 실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리라 본다. 이 책 1장부터 8장까지에서는 내가 신반포교회 대학부와 함께 걸었던 2년 6개월의 상황을 소상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감격스러운 때도 있었고, 시기와 방해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한 때도 있었고, 잃은 양을 붙들고 눈물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나 공통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로 나를 인도해주셨다는 사실이다. 매 순간 하나님이 도와주셨다. 매 순간이,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靈)으로 되는 것임을 깨우쳐주시는 시간이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순간마다 임하셨던 하나님의 숨결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9장에서는 내가 삼일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난 다음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당시 삼일교회에는 10명 정도의 청년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8명의 간사를 양육했다. 그렇게 새롭게 시작된 청년부에 이제는 미혼의 청년이 1만4천 명 정도 모이고, 전체 예배 인원은 2만 명이 넘게 되었다. 그렇게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살피면,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회복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진(陣) 체계로 표현되는 단순한 조직의 승리 덕분이었다. 10장에서는 연대기적인 사례(事例)에서는 다 밝힐 수 없는 대학·청년부 사역의 강조점들을 간단하게나마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강조점들은 비단 청년 사역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신반포교회에서 적용했던 원리는 장년 사역, 즉 지금 사역하고 있는 삼일교회에서의 사역에서도 그 보편성이 증명되고 있다. 똑같은 원리로 목회할 때, 똑같은 생명의 역사, 똑같은 반응, 똑같은 회개의 역사가 벌어졌다. 이러한 영적 부흥의 원리들을 통하여 많은 교회에서 부흥의 소문이 흘러나오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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